테니스를 좋아하지 않았던 분들도 혜성같이 등장한 정현의 활약상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은퇴한 이형택이 US오픈(호주오픈처럼 하드코드다)에서 16강에 오른 것이 최고의 성적이었으니, 전 세계 1위 조코비치(클레이코트의 황제 나달과 함께 페더러를 제일 많이 꺾은 선수)와 현역 세계 4위를 즈베레프를 연파하며 4강에 안착한 정현의 활약상에 (이명박이 망쳐놓은) 테니스에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윤종신의 부인인 전미라가 주니어 시절에는 세계 2위에 오를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성인 무대에서는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것에 비하면, 작년 11월의 넥스트 제너레이션 대회에서 우승한 여세를 몰아 2018년 첫 번째 그랜드슬램 대회(호주, 프랑스, 윔블던, US오픈 순으로 열린다)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정현의 상승세는 EPL을 뒤흔들고 있는 손홍민의 활약상을 뛰어넘을 태세입니다(그래서 뉴스룸에 나온 전미라의 조언은 적절할 수밖에 없다). 



정현이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페더러와 결승전에서 맞났다면 최상의 시나리오였겠지만,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페더러와 일전을 치르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요동칩니다. 피터 샘프라스와 안드레 아가시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며 남자테니스계를 완전히 평정(클레이코트인 프랑스오픈에서는 나달에게 발목이 잡혀 단 1회만 우승했다)한 로저 페더러는 조코비치와 나달, 머레이가 등장하기까지 무적의 선수였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밖에는 그의 전성기를 설명할 방법이 없을 정도였고, 휘귀병(이유없이 체력이 떨어지는 증상으로 고생했다)으로 고생하지 않았다면 통산 우승횟수와 통산 승률은 영원한 넘사벽의 수준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전성기 때의 페더러는 서브 앤 발리의 완성형이었고, 세컨 서브로도 에이스를 기록할 수 있었으며, 반 박자 빠른 포핸드는 최고의 여자선수 중 한 명인 슈테피 그라프의 포핸드를 연상시켰습니다. 



페더러의 유일한 약점은 한손 백핸드였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나달과 조코비치와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보강됐습니다. 경기 내내 평정심을 유지하는 집중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여서, 역사상 최고의 바둑선수로 평가되는 이창호의 평정심(돌부처라는 별명도 여기서 나왔다)와 비교하면 딱일 듯싶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발이 느려졌고 체력에서도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빼면 하드코트에서 페더러를 이긴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따기 같은 일입니다. 





박세리의 US오픈 우승을 연상시키는 정현의 폭발적인 상승세가, 하드코드(호주오픈 5회와 US오픈 5회, 총 10회 우승, 윔블던은 8회, 프랑스오픈은 1회 우승)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페더러를 넘어설 확률은 높지 않지만 1, 2세트를 최대한 길게 끌고갈 수 있다면 역사상 최고의 업셋도 가능합니다. 조코비치가 호주오픈 준결승에서 페더러를 꺾고 처음으로 우승했을 때도 끈질기게 물고늘어진 것이 주요했습니다. 



당시의 조코비치는 페더러의 리듬을 깨기 위해 자신의 서브게임 때 공을 코트에 튀기는 동작을 15~20회까지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신사적인 매너를 특히 중요시여기는 테니스의 특성 상 조코비치의 이런 행태는 상당한 비난에 직면했고, 그 때문에 실력에 비해 인기가 떨어지는 챔피언으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페더러를 꺾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페더러를 뛰어넘으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최근의 페더러는 자신의 서브게임에 전력을 다하는 방법으로 승리를 쌓고 있습니다. 매 세트마다 상대의 서브게임을 한 번만 브레이크하면 승리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곤 했습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타이브레이크에 집중하면 되기 때문에 이런 효율적이고 노련한 게임 운영이 37세의 나이에 제2의 전성기를 열 수 있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페더러의 경기 운영은 상당히 빠르다는 특징이 하나 더 있는데 정현이 이것에 휘말려들면 승리의 확률은 더욱 줄어듭니다. 



정현이 페더러의 높은 벽을 넘으려면 자신의 서브게임은 반드시 챙겨야 하며, 무엇보다도 페더러의 첫 서브에 대한 리턴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페더러의 서브 앤 발리에 작은 틈이라도 낼 수 있다면 코트 구석구석을 찌르는 스트로그와 패싱샷으로 역사상 최고의 업셋을 이룰 수 있습니다, 페더러의 백핸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것과 함께. 정현 파이팅!! 정현 그레잇!! 정현 결승 가즈아!!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윌리엄스 자매를 빼면 백인이 독점하고 있는 프로테니스에서, 그것도 4대 그랜드슬램 대회 중 하나인 호주 오픈에서 한국선수가 4강에 오른 것은 김연아의 우승에 버금가는 위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자 프로테니스에서 동양인으로써 세계 정상에 오른 선수는 마이클 창(대만, 프랑스오픈 우승)과 리나(중국, 호주와 프랑스오픈 우승)가 유일한데ㅡ현역으로는 일본선수 니시코리 게이가 US오픈에서 준우승한 것이 최고 성적이다ㅡ정현이 준결승에 진출함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사실 정현의 선전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넥스트 제너레이션'에서 미래의 남자테니스를 이끌어갈 선수들을 격파하며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이형택의 은퇴 이후 침체를 거듭하던 한국 남자테니스가 정현의 등장으로 새로운 전성기로 향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테니스의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에서도 정현의 활약으로 아시아/오세아니아 그룹 2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정현이 준결승에서 대결할 로저 페더러(2위)는 남자테니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절대강자여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지만, 페더러에 버금가는 선수로 평가받는 조코비치와 현 세계4위 즈레베프를 격파한 상승세만 유지할 수 있다면 사상 최고의 업셋도 가능합니다. 그랜드슬램 대회에서만 19회나 우승한 페더러는 잔디와 하드코드에서는 무적의 경지에 이른 절대강자이지만 나달과 조코비치처럼 장기전에 강한 선수에게는 약점을 드러내곤 합니다. 페더러가 정현의 플레이에 대해 클레이코트(프랑스오픈)의 황제 나달과 비견되는 하드코트의 조코비치 같다고 말한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따라서 정현이 페더러에게 1, 2세트를 내주더라도 랠리수를 늘리며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래서 5세트까지 승부를 끌고갈 수 있다면 꿈속에서나 가능할 기적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조코비치와 즈레베프 전에서 보여준 서브 리턴과 코드 좌우를 파고드는 패싱샷만 터져준다면, 동시에 첫 서브 성공률을 최대화할 수 있다면 천하의 페더러를 넘어서는 사상 최고의 기적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나달(세계 1위)이 탈락했기 때문에 페더러를 넘는다면 우승까지도 가능합니다. 





정현이 금요일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경기장에 들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이클 조던과 타이거 우즈보다 위대한 선수로 평가되는 페더러와의 경기에서 긴장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랜드슬램 대회의 준결승에서 경기를 즐기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면 그날의 정현이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공은 둥글고 아름다운 도전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구감독보다는 철학자에 가까웠던 요기 베라의 말처럼,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우승 문턱에서 좌절해온 유소연의 역전우승으로 끝난 ANA인스퍼레이션은 2017년 들어 최고의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는 한국 낭자군의 상승세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렉시 톰슨의 4벌타(공의 미세한 위치 변경으로 2벌타, 스코어북 기재 잘못으로 2벌타)에서 알 수 있듯 아주 작은 부주의에도 냉혹한 벌칙을 가하는 골프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었던 첫 번째 메이저대회였습니다. 유소연은 메이저대회에 강한 것으로 유명한 '침묵의 암살자' 박인비와 함께 플레이하면서 마지막까지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역전우승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 같습니다. 





물론 유소연과 동타로 파이널라운드를 마친 렉시 톰슨이 4벌타를 받지 않았다면 역전우승은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메이저대회 우승을 위해서는 행운도 따라줘야 한다는 것을 세삼 확인해주었습니다. 동전으로 볼 마크를 하고 다시 놓은 루틴에서 아주 미세한 오차를 발견하고, 그것에 가차없는 벌타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LPGA의 공정성은 상당한 평가를 받을 것 같습니다. 톰슨에게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최악의 악몽이겠지만, 관중들의 환호에서 봤듯이 전화위복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골프팬에게 톰슨의 불행은 그녀를 응원하는 팬심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성적에 따라 톰슨을 최고의 인기선수로 끌어올릴 가능성이 농후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승의 문턱에서 수없이 좌절해온 유소연이 질기고 질겼던 징크스를 탈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 배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지만, 2017년의 ANA인스퍼레이션은 톰슨의 불행으로 더많이 회자되고 기억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면 유소연의 우승기록은 남고 톰슨의 불행은 잊혀지겠지만, 당분간은 톰슨이 받은 4벌타가 세계 여성골프계의 최대 화제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톰슨의 인지도를 지금보다 몇 단계는 끌어올릴 것이며,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몸값을 올렸다는 점에서 압도적인 우승을 놓친 것을 만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최고의 장타력을 보유한 톰슨으로써는 오늘의 불행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는 밑거름으로 전환시킬 수 있개를 바랍니다.  


  

셀 휴스턴 오픈에서 강성훈이 역전패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남녀골퍼가 PGA와 LPGA를 동반우승하는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날로 기록됐을 텐데, 그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축구에서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고 하듯이, 골프에서는 '장갑을 벗을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속설이 오랜 경험의 산물이라는 것을 ANA인스퍼레이션이 증명해주었습니다. 톰슨에게는 안타까운 대회였지만, 유소연에게는 오랜 징크스를 깨는 의미있는 대회가 됐습니다.  





특유의 장타에 퍼팅마저 좋아진 톰슨은, 소렌스탐에 버금가는 독주를 예상했던 아리아 주타누간과 함께 한국낭자들의 경계대상 1호라는 점은 확실해졌습니다. 메이저퀸 박인비의 부활과 슈퍼루키 박성현의 선전, 이미림과 장하나, 전인지, 김세영, 양희영 등까지 LPGA를 주름잡는 한국낭자군의 면모는 사상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체력적 문제인지, 아니면 정신적으로 위축됐는지 김효주의 부진이 아쉽기만 하지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ANA인스퍼레이션의 우승자가 유소연이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샷은 트러블샷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18번 홀에서의 칩샷을 들 수 있습니다. 톰슨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강성훈의 역전패를 만회해준 유소연에게 진심어린 축하를 보냅니다. 유소연은 올해의 목표가 3승이라고 했는데, 기왕이면 US여자오픈(우승한 경험이 있다)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메이저 대회에서 2번의 우승을 더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물론 한국낭자들이 골고루 우승해도 상관없고요. LPGA의 흥행에 찬물을 끼얹지 않는 선에서 한국낭자들의 우승이 늘어나기를 바랍니다. 남자선수들의 우승도 전해졌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테고요. 유소연과 강성훈에게 축하를 보내면서.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권투는 체급별 경기이지만, 로베르토 듀란과 슈가레이 레너드에 이어 파퀴아오 등이 나온 이후에는 이런 얘기가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물론 최고 중량의 헤비급은 예외입니다. 이 체급은 동양인과 백인들이 최고 자리에 오르기가 거의 불가능한 체급이며 듀란이나 파퀴아오가 도달할 수 없는 중량입니다. 한국계 복서로 제이콥스와의 방어전을 힘들게 치른 골로프킨도 헤비급으로 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권투에서 인종적 우월성 등을 얘기한다는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얘기지만 최소한 헤비급에서만은 흑인들을 능가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무패로 사망한 백인 출신의 헤비급 챔피언인 록키 마르시아노도 조 루이스나 무하마드 알리(캐시어스 클레이 시절이 더욱 뛰어났다), 조지 포먼이나 마이크 타이슨 등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무패의 챔피언으로써 생을 마감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최근에는 무하마드 알리와 마이크 타이슨을 놓고 헤비급 최강자를 가리는 논쟁들이 심심찮게 나옵니다. 조 루이스와 무하마드 알리를 비교하던 것에서 조지 포먼과 무하마드 알리를 비교하던 것으로 넘어갔다가, 조 루이스와 조지 포먼을 밀어내고 마이크 타이슨이 들어선 것인데,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이 두 선수가 전성기 때 만났다면 무하마드 알리에게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체급을 통틀어 최고의 복서로 추앙받던 슈가레이 로빈슨이 복싱의 모범으로 자리한 것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하지만 조지 포먼의 전성기와 마이크 타이슨의 전성기를 비교하면 저는 주저 없이 조지 포먼을 선택할 것입니다. 둘의 펀치 강도(포먼은 중량감에서, 타이슨은 스피드에서 우위를 점한다)가 엇비슷하고 가정할 때, 같은 헤비급이지만 기초적인 체격과 중량이라는 것이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펀치를 맞았을 때 그것을 극복해내는 내구성(이를 테면 맷집)에서 타이슨은 포먼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뜻합니다. 타이슨은 포먼처럼 체구가 월등하게 큰 상대에게는 곧잘 약점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물론 이런 판단에도 타이슨이 먼저 포먼에게 강타를 성공시켰다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역대 모든 헤비급 선수들의 데이터를 완벽하게 소화해서, 존재하는 모든 변수들을 적용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선수별 승리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초인공지능이 나오지 않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준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가볍고 작은 타이슨이 스피드만으로 포먼을 제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허면 체중을 제외한 채 전 체급에서 최고의 복서는 누구였을까요? 무패로 은퇴한, 역사상 최고의 수비능력을 보여준 메이웨더와 가장 많은 체급을 석권한 파퀴아오의 대결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골로프킨과 제이콥스의 경기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았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복서라는 골로프킨과 비교하면, 플라이급에서 라이트 미들급까지 8체급이나 석권한 파퀴아오가 한수 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플라이급에서 주니어 미들급까지 무려 8체급을 올렸음에도 펀치력과 맷집, 의외의 각도와 자세에서도 나오는 펀치 등은 가히 천하일절이라 하겠습니다. 최소한 패하지 않는데는 어떤 선수보다 탁월했던 메이웨더에게 패했지만, 체급에 따른 펀치력과 내구성에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는 복싱에서 8체급을 석권했다는 것은 향후로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기록일 수 있습니다.

파퀴아오가 실신 KO패를 당한 적도 있지만 재기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파퀴아오가 그보다 한 체급 위의 챔피언이었던 마빈 헤글러나 같은 체급의 선수였던 슈가레이 레너드나 로베르트 듀란과 붙었으면 어땠을까요? 아니면 밴턴급의 전설적인 강자였던 자라테와 같은 체급으로 붙었다면 또 어땠을까요?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는 중에 역사상 최고의 복싱선수에 대한 궁금중이 일었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선수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 챔피언이었던 유명우와 장정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채널인 ESPN도 역대 최고의 복서 50명을 선정해 발표한 적이 있는데 아래의 명단이 바로 그것입니다.

 

 

1위. 슈거레이 로빈슨 1940-65  175승(109KO)19패6무2NC    2위.  무하마드 알리  1960-81  56승(37KO)5패

3위. 헨리 암스트롱  1932-45  151승(101KO)23패9무            4위.  조 루이스  1934-51  68승(54KO)3패

5위. 윌리 펩  1940-60  230승(65KO)11패1무                      6위.  로베르토 두란  1968-01  103승(70KO)16패

7위. 베니 레오너드  1911-32  85승(69KO)5패1무                 8위.  잭 존슨  1897-1928  77승(48KO)13패14무

9위. 잭 뎀프시  1914-27  61승(50KO)6패8무                      10위. 샘 랭포드  1902-26  167승(117KO)38패37무3NC

11위. 조 간스  1891-1909  120승(85KO)8패9무                  12위. 슈거레이 레너드  1977-97  36승(25KO)3패1무

13위. 해리 그렙  1913-26  105승(48KO)8패3무                   14위. 록키 마르시아노  1947-56  49승(43KO)무패

15위. 지미 와일드  1910-23  131승(90KO)3패2무                16위. 진 터니  1915-28  61승(45KO)1패1무1NC

17위. 미키 워커  1919-35  93승(60KO)19패4무1NC             18위. 아치 무어  1935-63  183승(131KO)24패10무1NC

19위. 스텐리 케첼  1903-10  52승(49KO)4패4무                  20위. 조지 포먼  1969-97  76승(68KO)5패

21위. 토니 칸초네리    22위. 바니 로스   23위. 지미 맥라닌    24위. 훌리오 세자르 차베스   25위. 마르셀 세르당   26위. 조 프레이저    27위. 에자드 찰스   28위. 제이크 라모타   29위. 샌디 새들러   30위. 테리 맥거번   31위. 빌리 콘   32위. 호세 나폴레스   33위. 루벤 올리바레스   34위. 에밀 그리피스   35위. 마빈 헤글러   36위. 에델 조프레   37위. 토마스 헌즈   38위. 래리 홈즈   39위. 오스카 델라 호야   40위. 에반더 홀리필드   41위. 테드 루이스   42위. 알렉시스 아르게요   43위.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   44위. 퍼넬 휘태커   45위. 카를로스 몬존  46위. 로이 존스 주니어   47위. 버나드 홉킨스 48위.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49위. 에릭 모랄레스   50위. 마이크 타이슨





저는 이 50명의 선수들 중에 5위, 13위, 17위, 25위, 31위, 34위 선수의 경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ESPN이 선정한 순위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지만, 몇 명의 선수와 순위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맷집만 빼면 역사상 최고의 테크닉과 스피드를 가진 로이 존스 주니어, 한 체급에서만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던 마빈 헤글러와 버나드 홉킨스, 무패의 챔피언인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짐승에 가까웠던 마이크 타이슨에 대한 순위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라이트 헤비급과 헤비급 챔피언을 지낸 아치 무어를 포함시켰다면 똑같은 과정을 거친 마이클 무어러도 선정됐어야 했습니다. 자라테(홍수환을 두 번이나 KO시킨 자모라를 KO로 잡았다) 같은 멕시코 출신선수와 유제두와 박찬희, 유명우 같은 아시아 선수들이 빠진 것도 쉽게 납득할 수 없습니다. 유제두는 동양의 한계 체급이라 하는 미들급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순위에서 밀릴 수는 있어도 박찬희 같은 선수나 박찬희의 최대 적수였던 미구엘 칸토 같은 선수가 빠진 것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박찬희는 체력적인 문제가 있지만 모든 체급을 통틀어 그만큼 화려한 테크닉을 가진 선수도 드물었습니다. '복싱교수'라는 호칭을 받았던 미구엘 칸토의 스트레이트성 어퍼컷을 떠올려 보면 그가 50위 안에 들지 못한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펀치력을 빼면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보여준 유명우가 빠진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량급 위주의 선수 선정과 순위는 지극히 미국적인 관점이어서 더욱 동의할 수 없습니다.

 

 

물론 역사상 최고의 복서를 가리는 일은 신의 영역에 이르러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한계를 인정할 때, 저는 개인적으로 로베르트 듀란과 마빈 헤글러, 슈가레이 레너드, 무하마드 알리를 역사상 최고의 복싱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무패의 페더급 챔피언이었던 중남미 선수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챔피언이었을 때 교통사고로 사망해서 그렇지 그가 방어전을 계속해서 치를 수 있었다면 분명 50위 안에 들었을 것입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복서라는 골로프킨이 체력적 한계를 드러낸 제이콥스와의 대전을 지켜보면서 복싱팬으로 살아온 40여 년의 기억들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복서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하십니까? 당신의 마음 속에 자리해 있는 최고의 권투 영웅은 누구입니까?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심판의 판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전방과 후방, 허리 모든 면에서 A대표팀은 월드컵에 8회 연속으로 진출한 팀이라고 하기에는 개인기와 조직력 모두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지난 주에 중국에 충격적인 1대 0 패배에 이어 시리아와의 일전에서 보여준 대표팀의 경기력은 수준 이하였다. 축구에서 평가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들이 엉망진창이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봐야 할지 모를 정도로 A대표팀은 망가져버렸다. 





A대표팀의 문제는 조직력과 순간 대응력이 떨어지는 수비진의 우왕좌왕, 별로 뛰어나지 않는 개인기에만 의존하는 공격진의 단조로움, 게임을 조율하고 상황에 따른 전술변화를 창출해야 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와 리베로의 완벽한 실종까지 총체적인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에 슈툴리케 감독의 책임이 가장 크다. 약체 시리아를 홈으로 불러와서도 전반에 터진 홍정호의 중거리슛 한방으로 신승한 것은 후반전에는 위기의 연속이었다는 점에서 경기를 즐길 수 없었다.



필자의 정도의 나이에 이르면 승패에 연연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기에 재미있는 경기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강해진다. 월드컵에 9회 연속 진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겠지만, 모든 경기가 납득될 수 있는 수준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공한증을 벗어나지 못해 시진핑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중국 A대표팀과의 경기에서 패했을 때도 경기력이 높았다면 아무런 불만도 없을 터였다. 



그런 이유로 해서 오늘의 시리아전에서는 중국과의 졸전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을 슈틸리케 감독이 내놨어야 하며, 선수 기용과 정신 무장도 그에 따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어야 했다. 중국전에 이어 오늘의 시리아전을 보면 대표팀이 보여준 경기력이란 어떤 특징도 찾을 수 없는 지리멸렬한 수준이었다. 전반 4분만에 골을 넣은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슈틸리케 감독이 내놓은 처방이 무엇인지 확인할 방법이 아예 없었다. 





월드컵 9회 진출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경기력으로 월드컵에 진출하면 어떤 대진표를 받아들던 예선에서 참패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표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때다. 그중에 슈틸리케 감독의 경질이 포함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표팀만의 칼라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누구나 말해서 식상한 말이지만) 월드컵 8회 연속 진출팀의 수준에 맞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대표팀에 뽑혔고 경기에 나선 선수들의 마음가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지만 중국과 시리아와의 졸전에 관해 냉정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하고 무엇이 문제라고 하던 경기력은 선수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소속팀에서의 활약만으로는 부족하다. 대표팀은, 그것도 A대표팀은 한국축구 전체와 성공적인 역사, 현재의 위상과 미래의 가능성을 대표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승리에 마냥 박수만 쳐줄 수 없는 것을 너무 섭섭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모든 것이 꾸며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그를 찾아 비궁을 나섰을까. 천 년을 이어온 전설이 하나의 거짓과 하나의 비밀이 조작해낸 인공적 설정인 것을 알았다면 나는 무공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알고도 화월곡에 오년이나 머물러 있었을까.

 

 

 

그때까지 나는 운명을 비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운명이란 놈은 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어떤 가능성도 열려 있는 내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하고, 운명의 최종 형태를 안다면 난 하루도 더 살 이유가 없다. 너무 재미가 없을 것이고, 어떤 자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세상 속에 있는 것,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자 인류로 이루어진 세상의 영속성이다. 나는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에만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최소한 나에게 운명 따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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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강천과 비무를 한지 오년 후였다. 그날의 비무 이후 나는 이곳에 머물러 전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어리석음이 빌어먹을 운명을 비트는 출발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하나의 약속이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와의 비무 이후 정확히 오년 만이다. 그때 고집스럽게 지켜온 나만의 경계선 안으로 천년을 이어온 최고의 무대에서 밀려난 주인공이 들어섰다. 그때는 그것도 운명이라 믿었다. 그날은 그와 비무를 한지 오년 후의 어느 날, 하늘 너무 푸르러 슬퍼보였고 녹음은 깊어 오히려 답답했으며, 대지는 너무 충만해 마음이 허기진 그런 날이었다.

 

 

 

 

군가 류심환이 쳐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오는 길을 아는 사람은 류심환이 유일했다. 천상지무를 보는 대가로 검강천에게 알려준 이곳은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동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류심환에게 있어 절대의 공간이자, 한 없는 기다림의 감옥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그가 땅의 진동과 공기의 파장을 감안해 살펴볼 때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편이지만 맨 앞에서 달리는 자의 경우 경공이 많이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뒤를 이어 여러 명이 비슷한 속도를 내며 경계 안으로 함께 들어섰지만 흔들림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앞사람이 들어온 방향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포위망을 형성하며 들어온 것을 보면 그들은 추적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한 것은 어지러운 보법을 펼치고 있는 자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를 쫓는 자들도 좀처럼 보기 힘든 고수라는 사실이었다. 류심환이 이곳에서 깨달은 무공의 원리에 따라 쳐놓은 경계 속으로 그들이 들어섰다 느꼈을 때, 그들은 이미 모옥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목적지가 모옥이 아니라면, 그들의 경공이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고, 한 명이 도망가고 여럿이 쫓아가는 것으로 볼 때 한 바탕 소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아니라면… 누군가 선을 넘었어.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자는.. 그래, 오직 그 뿐이야. 그에게만 입장권을 발행했으니까.'

 

 

 

류심환은 천천히 문 앞으로 나왔다. 소란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의 마지막으로 내몰리는 자가 누구며 그를 그렇게 집요하게 쫓아오는 자들이 누구인지 일말의 궁금증은 있었다. 그래서 문 앞에 나와 섰다. 궁금증 주위를 맴도는 어지러운 바람을 애써 외면한 채 그는 거대한 대문이 열리듯 우측으로 몸을 돌렸다.

 

 

 

허나, 그가 아니라면 경계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금단의 선을 넘었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을 문 앞까지 나오게 했다. 죽음같이 적막했던 5년간의 시간을 그들이 깼다. 이것에 대해 그들은 어떤 식이던 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무한정의 약속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없고 자신의 기다림은 그만이 깰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 일 푼의 궁금증에 숨어 있던 바람이 얘기했던 한 사람, 5년이란 세월을 격하여 류심환 앞에 운명처럼 서있는 한 사람.  

 

 

 

죽음의 문턱에 선 피투성이 무인, 찢어진 도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그가 얼마나 힘든 격전을 치렀는지 짐작케 했고, 손가락 끝을 타고 지면으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은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줬다. 그 엄중한 상태에서 얼마를 달려 온 것인가. 생의 끝까지 내몰린 채 그가 달려 온 이곳까지 그 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그만큼의 거리와 비슷했을까. 그는 호흡이 매우 거칠었고 때 없이 흔들렸다.

 

 

허나, 그런 순간조차도 존재하는 그 자체가 위대함인 단 한 사람. 나만의 경계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내 기억 속에 각인돼 있어서 단 한 순간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래서 귀찮아도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단 한 명의 절대자다급한 상황이 분명함에도 흔들림 없이 침잠되어 있어,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수련의 깊이를 드러내는 강렬한 눈빛의 소유자.

 

 

수많은 위험과 고비를 뚫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도 미약해진 기운이지만 이 세상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맑고 단아하며 고결한 기도. 만남의 첫 순간부터 각인돼,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단 한 사람만의 기도. 내 기억 속에 항상 머물고 있던 단 한 명의 사람. 약속이란 이름으로 내 자유를 박탈해 5년간의 고독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사람, 검강천.

 

 

 

“천상천주 검강천.”

 

 

 

그였다. 천하에 그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하늘 아래 이 같은 기도를 가진 사람이 그 아니면 또 누가 있겠는가. 자신이 쳐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는 천년 전설의 주인공인 천상천주 검강천이었다. 5년간의 기다림 속에서 비로서 깨달은 고독의 실체를 알게 해준 사람,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찾아왔다.    

 

 

“류공!”

 

 

흔들리는 검강천의 부름이 류심환의 가슴에 날카롭게 닿았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들은 너무 많고 치명적이어서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렇게 많은 상처를 입은 채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기적일 따름이었다. 죽음의 순간을 필사적으로 늘려가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왼손에 품고 있는 것에 있었다.

“천주.. 오랜만입니다.”

 

 

그 짧은 부름에 역시 짧게 답하는 류심환의 음성에도 이처럼 느닷없이 일어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떨림이 묻어났다. 그것은 전혀 예측조차 못해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현실로 일어난 최악의 상황에 대한 놀람이었다. 허나, 오년 전에 한 약속,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아이를 맡아주시오.”

 

 

 

검강천이 거두절미하고 왼손으로 안고 있던 아이를 건넸다. 아직까지 그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이자, 오년 전에 예약한 부탁의 내용이었다. 너무 맑고 깊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검강천의 심연 같은 눈동자가 류심환이 아이를 받아 들자 잠깐 흔들렸다. 그것은 류심환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시선이었다.  

 

 

 

‘중독됐어!’

 

 

 

류심환은 검강천으로부터 아이를 받아든 순간, 아이가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류심환이 검창천에게 눈으로 물었고, 검강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빛으로 중독의 위중함을 류심환에게 알려주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류심환의 말에 검강천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심연으로 돌아왔다. 그가 보인 순간의 흔들림은 심연의 수면을 건드리고 날아간 잠자리의 파장 같은 것이었지만, 슬픔과 체념이 교차하는 안도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일단 마음을 다잡자, 아니 더 이상 죽음을 늦출 여력이 없을 인정하자, 애당초 그에게 흔들림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처럼 보였다. 

 

 

“아이 이름은 무영이네.”

 

 

 

검강천이 건내준 아이를 류심환이 말없이 안아 들었다. 예닐곱 살 가량으로 보이는 아이는 자신이 낯선 이의 품으로 넘겨졌음에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또렷한 눈망울만 깜박이고 있었다. 중독의 고통 속에서도 현 상황의 위급함을 정확히 알기에 아이는 신음소리를 내거나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깊게 가라앉은 채 두려움을 감추며 아비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과 꽉 다문 입술이 류심환의 뇌리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은 너무나 생경했지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뛰어난 아이일지도..’

 

 

 

급히 진기를 주입해 중독의 속도를 줄이며 아이의 상태를 살펴본 류심환은 아이의 신체가 무술을 위해 태어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맑고 청아해 슬픔을 간직한 듯한 아이 눈빛이 검강천과 류심환을 인연의 끈으로 다시 묶은 것은 설명하기 힘든 인연 같았다. 조건이 약속이 되고, 약속이 새로운 인연을 창조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아이와의 인연은 질긴 운명으로 발전해 가리라. 늘 그랬듯 빌어먹을 운명은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다시 닻을 올린 운명이란 놈이 류심환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비틀었다. 그 비틀림의 시작에 검강천이 있었고, 중간에 류심환과 무영이 있었고, 그 끝에 그로부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불나방 같은 놈들…’

 

 

 

“저기다!”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소리쳤다.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창조한 운명이 추격자 무리의 외침을 빌려 검강천과 아이에게 소리쳤다. 그 소리의 시작은 수십 장 밖이었는데 어느 새 그들도 모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적자들은 무서운 속도로 검강천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 중에는 검강천과 비슷한 옷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늘 안 좋은 예감은 현실이 된다. 안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서 안 좋은 예감은 늘 그랬다.

 

 

 

‘역모?’

 

 

 

류심환은 기세당당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추적자들을 보며 검강천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왜 안 좋은 예감이 늘 이렇게 맞아 떨어지는 지 추적자 무리들을 응시했다.

 

 

 

‘내부의 소행이 아니면 천하에 이런 상황을 만들 자는 어디에도 없겠지.’

 

역시 안 좋은 예감에 예외는 없었다, 지금처럼. 검강천을 살해하려는 역도들의 내는 경공의 파공음이 그의 등 뒤에 이르렀다. 천년 무림의 최강자, 검강천의 죽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행동으로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검강천과 류심환에게 그들의 존재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오년 전의 약속만 의미 있었다. 무영의 미래, 그리고 그밖의 무수한 일들..

 

 

 

“아이를 무인으로 키워주시게.”

 

 

 

이것이 류심환이 검강천으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다. 천상천의 신물 천상옥패와 그의 애검인 승천제마검, 그리고 한 권의 서책을 건네면서 검강천이 류심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다. 이것으로 천년의 전설에 처음으로 금이 갔고 그 금은 너무 커서 전설을 뿌리 채 흔들었지만 류심환을 보는 전설의 주인, 검강천의 눈에는 분명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의 약속으로 인해 천상천이 살아 있음을, 이를 아이가 입증할 수 있도록 천하제일인으로 키워주시게. 부탁하네.’

 

 

 

검강천의 믿음이 류심환에게 말하고 있었다. 허나, 천상천주 검강천만 놓고 보면 한 번 기울어진 위세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울어진 틈새를 노려 불나방들의 검, 도, 장, 지 등 탐욕과 역겨움의 짓거리가 역천이란 이름으로 가장해 전설의 주인에게 날아들었다. 전설이나 신화가 영원할 수는 없다면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리라.

 

 

 

“알겠습니다. 약속 지키지요.”

 

 

 

류심환이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섰다. 독에 힘겹게 버티던 아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비의 죽음을 보기 싫었던 듯,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듯, 천상무극독에 악착같이 버텼던 아이가 의식의 마지막 조각을 놓쳐버렸다. 류심환의 응급조치에 의해 아이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것을 지켜본 검강천도 자신의 등 뒤까지 살수를 펼친 그의 형제와 식솔들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두 사람의 등이 마주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멈춰 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억겁을 두고 그렇게 서 있어 세월의 흐름도 멈춰선 듯 했다. 그 사이에서는 역모의 탐욕자들이 펼친 가공할 위력의 합공은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사물이 정지된 채 절대의 고요에 빠져들어 두 운명의 스쳐감과 틀어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다 누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앞으로 날아갔다. 한 사람은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죽음을 향해, 한 사람은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연의 미래를 향해.

 

[그래서 천상천을 다시 세우는 날..]

[우리의 약속도 지켜지게 되겠지요.]

 

 

 

두 사람 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음이 오갔고 검강천으로서는 그 이상의 전음을 이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자들을 막기에도 힘겨웠기에. 류심환이 무영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시간이 남아 있기도 했고. 자신을 쫓아온 무리들은 이들만이 아니었고,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 있었다.

 

 

'무영아, 잘 자라서 아비처럼 후회를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라. 아비는 비록 떠나지만 언제나 네 주위에서 함께 할 거야.

 

 

 

검강천이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진기까지 끌어올려 몸을 날렸다. 신화의 영역에서 더욱 빛났던 그의 검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5년전 류심환에게 보여주었던 천상지무가 두 번째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위력은 너무나 달라서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약간의 시간을 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전설의 영역에 올라선 신화의 주인공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 덕분에 신화는 계속될 수 있었지만. 

 

 

‘아빠… 아빠…’

 

 

혼절한 아이의 보낼 수 없는 마음이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아 몇 날을 목 놓아 울었다. 그때 하늘 밖에 있던 하나의 떠 있는 눈이 빙긋거렸다. 눈짓으로만. 그 빌어먹을 운명의 장난질이 인간에게 해왔던 것처럼, 하나의 떠 있는 눈이.  



이 모든 일은, 무려 천년 동안 얽히고 섞여서 부대끼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회한의 여정(旅程)에서, 덧없이 사라진 수많은 죽음을 양산했고 그에 따른 복수의 대물림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삶과 죽음, 명성과 배신, 욕망과 탐욕, 정의와 협력 사이에서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검강천을 만나 비무를 청한 것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무영이 무대 위로 올라 임시주연이 아닌 진정한 주연임을 선언하는 순간 끝이 났다. 운명이 틀어버린 무림과 그에 얽힌 수많은 단상들의 허튼 꿈과 욕망과 처절한 몸부림의 물길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그 기나긴 여정은 하나의 전설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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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설이 있다. 그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전설을 고금제일이라 불렸으며, 그 전설의 주인이 홀로 나타나 건곤일척의 천하를 구했으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설이 되어버린 것.

 

 

무림의 역사에는 존재했으나 군림하지 않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 하늘 위에 위치한 하늘, 절대 문파 천상천(天上天)과 그 천상천을 전설의 영역에 들게 한 오직 하나의 절대무공. 천상지무(天上之武)! 홀로 일어나 천하지혈난(天下之血亂)을 종식시킨 단 한 명의 영웅에게만 몸을 허락한 절대신공.

 

 

무인이라면 누구나 이르고자 하는 무공의 최후 경지. 무림 역사상 단 한 사람만이 이르렀다고 전해 내려오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 말로 들었으나 전해지지 않아 볼 수 없었고, 못 봤기에 상상하였으나 누구도 그려낼 수 없었던 전능의 위력은 오직 무림 역사 상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전해졌다.

 

 

천 년 전 무림 태동기, 정파의 무공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마의 화신인 음양합일역천지마(陰陽合一逆天之魔) 화극연이 역천마곡(逆天麻谷)을 세워 지옥혈왕의 열두 가지 힘, 십이마혼(十二魔魂)을 깨우고, 하나같이 절정 마인으로 키워낸 400명의 살귀를 이끌고 나타나 세외무림에서 중원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무차별로 살육해 가던 시절에 전설은 시작됐다.

 

 

그 천하 존망의 위기에 한 명의 영웅이 홀연히 나타나 절대마인과 그 혈겁의 추종자들을 홀로 처단해 갔다. 첫 발검으로 시작한 무림 구원사는 꼬박 1년이 흘러 태산의 정상에서 절대 마인 화극연을 전설의 검, 승천제마검(昇天制魔劍)으로 양단하니, 시산혈해를 이룬 혈겁은 그것으로 진저리 치는 피의 향연을 멈추게 됐다. 홀로 무림을 다니며 절대마인을 제거해 세상을 구하니(獨行武林 殺魔求世)비로소 검을 놓고 단 한 마디의 칭송도 받지 않은 채, 영웅은 자신이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무인과 일반인 가릴 것 없이 세상은 그를 칭송하여 무림혈록에 기록하기를 '정사무한대첩(正邪無限大捷)'이라 했으니 그것이 1년간의 혈겁의 역사며 홀로 진행한 무림 구원의 대장정이었다. 그가 절대마인과 그 추종자들을 한 자루의 검으로 베어가던 그 1년간의 여정을 천검지로(天劍之路)라 명명했고, 영웅의 업적을 기려 그를 천상무존(天上武尊)이라 칭송했으며, 그의 무공을 하늘의 무공이라 하여 천상지무(天上之武)라 함에 천 년 무림 혈사의 첫 장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이렇게 그날의 일은 전설의 첫 장에서 인구에 회자되어 전설의 영역으로 들어섰고 그가 걸었던 독행무림(獨行武林)의 영광을 모든 무인들이 추구하여 하루도 검을 놓지 않으니 무림은 그것으로부터 흥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무림은 세상의 중심에 뿌리를 내렸으며 역사를 이루고 또 다른 영웅을 탄생시키며 전설의 장을 넓혀 갔으니 무림 역사가 이로써 비롯됐다 해도 과함이 아니었다.

 

 

                                                                      행복한 산쟁이에서 인용  

              

 

그리고 한 가지 말, 모든 영광과 흠모를 뒤로 한 채 다시 은둔으로 돌아가면 천상천주가 했던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되니 그것이 천 년에 걸쳐 더해지고 부풀려져 하나의 전설에 이른다. 말이란 기억을 통해 상상을 자극하기에, 경험 이전의 신비감을 갖기 마련이며, 그래서 몇 마디 말에 불과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되기에 모든 세대를 걸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멸의 존재로 우상화된다. 거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당시의 사실은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간 후, 태양처럼 빛나는 부분만 세상을 회자한다.

 

 

“내 이제 천하를 구하고 떠나니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자 다음을 기억하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그 아래이니, 내 생각 속에 모든 바람을 담고 내 육체 속에 생각을 풀어놓아라. 태극(太極)에서 십방(十方)까지 만물의 이치가 이 안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는 자 그 흐름을 자신이 되게 하라.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자 영원히 하늘 아래 있고 그 경지를 넘어선 자 하늘 위에 있으리라. 내가 이루지 못한 이 경지를 뛰어넘는 자, 비로소 천하를 얻고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후인이여,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는 날 다시 하늘을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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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강천은 마음이 급했다. 속도를 낼수록 오른쪽 어깨를 관통한 상처와 깊게 갈라진 왼쪽 옆구리에서계속 피가 흘렀다. 내상도 치명적이어서 최소한의 운기조식이라도 해야 했지만 점점 가까워 오는 포위망에 아예 쉴 수도 없었다. 피와 땀이 뒤범벅돼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처음에 30장마다 떨어졌던 핏자국은 지금에 이르러 3장으로 좁혀졌으니 그의 내력도 점점 고갈됐고, 그만큼 남은 삶의 시간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지러웠다. 전력질주가 네 시진을 넘어서면서부터 어지러움은 달리는 속도를 뭉툭 뭉툭 갉아먹었다. 살을 가르는 통증이야 그렇다 쳐도 한 시진 전부터 흩어지기 시작한 기력은 점점 바닥을 향해 달렸고 이를 알면서도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야 이미 버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 역천의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아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실존하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존재였다. 신화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삶이란 너무나 협소해, 천하가 혈란에 빠져들지 않은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이들보다 높은 곳에 있었지만, 칭송의 대상이었지 그들 사이에 있을 수 없었고, 존재하는 인간이었지만 그 실재가 현존하는 인물로 세상에 속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검강천은 지독히 외로웠고, 누구와도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죽음으로써 신화의 영역에 올라올 때까지는 자유로워질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해.’

 

 

모든 것이 잘못됐지만, 잘못돼 한참은 정도에서 벗어났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그것은 천년 전설의 진정한 주인이 이 아이이며, 이 아이만이 변질된 천년의 전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아이로 인해 전설은 더 이상 신화의 영역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에게 모든 가능성이 닫혀 있었다, 반나절 전까지는.

 

 

‘신화는 당사자에게 지옥이야. 이 아이는 지옥에 오르기 전까지만이라도 자유로워야 해.’

 

 

검강천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가 지금 죽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이를 살려야 가능하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달리면서도 운기행공이나 지혈도 할 수 없었다. 촌각의 시간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나 그것을 탓하지 않았고, 그것이 옳다면 누구의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으며, 먼저 돌아서지 않았고, 한 번 준 믿음은 이미 주었기에 거둔 적이 없었다.

 

 

헌데 평생을 함께 해온 이복형의 절대권력을 향한 탐욕의 칼에, 모든 것을 쥐고 싶었던 한 여인의 부정한 욕망에 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이제는 이 아이마저 위태롭다. 무림은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가고, 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부를 늘리며, 뛰어나 자질을 소유한 문도를 늘림으로써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정치를 닮았다. 절대적 힘을 갖게 되면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인 정치를 닮아서 무림은 피와 배신, 복수의 역사와 동일하다. 악은 그런 과정에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해서.. 살려야 했다.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내 유일한 핏줄이어서가 아니라, 아이의 어미, 그 처참한 죽음 때문이 아니라, 틀어진 천년의 전설을 바르게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아이가 살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다. 그 이유만으로 나는 내 아내의 죽음까지 받아들였다, 피눈물과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천형(天刑)의 사랑으로. 검강천은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지이잉!

지-잉!

 

 

그의 오른손에서 승천제마검(乘天制魔劍)이 슬프게 울었다. 주인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 검명에는 습기가 가득해 검루(劍淚)를 뚝뚝 흘릴 듯 슬프게 울었다. 빠르게 뒤로 눕는 풀들 위로 여전히 검붉은 피와 영혼마저 잠식하는 땀이 떨어져 내렸고 하늘도 슬픈지 서쪽으로 길게 스러져 갔다. 어둠은 그에게만 밀려들었고 어디에서도 빛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검강천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 너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니..’

 

 

그의 내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다리도 하염없이 무거워졌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속도는 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 없었다. 하나의 약속이 남았기에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죽음이 그것을 막는다면 죽음부터 벨 것이고, 죽음을 베지 못한다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이기에 한 움큼도 남지 않은 의식을 한시라도 놓을 수 없었다.

 

 

가서, 그를 만나야 한다. 그에게 이 아이를 맡겨야 한다.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전설과 같은 영역에 올라선 사람, 류심환. 그에게 이 아이를 맡겨야 한다. 그 하나의 이유로 나는 쓰러질 수 없다. 기력이 다해 다리가 멈추면 기어서라도 가리라. 무릎이 다 닳아 뼈가 드러나 길 수 없다면 손가락으로 땅을 긁어서라도 가리라.

 

 

나에게 마지막 하나는 남았다. 하나의 약속만은 남았다. 오년 전에 했지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바람처럼 지나간 약속, 그 하나만은 남았다.



“초식명은 천지빙결검류(天地氷結劍流)라 하네. 한천마결의 제1초지.”

 

 

검강천은 극음지기의 정수, 빙혈류를 천상천의 천상무극진기(天上無極眞氣)에 실었다. 빙혈류가 만든 적홍의 음강이 점점 투명해졌다. 색의 변화는 투명함으로써 오히려 적홍의 음강보다 더 강렬하게 보였다. 어쨌든 차가운 음강 아닌가.

 

 

"비록 제1초식이라 해도 각 빙강마다 다섯 단계의 변화가 있네. 단순히 음강의 격발만은 아니라는 것이지."

 

 

말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손 안에서 키운 음기의 결정체, 구를 맹렬하게 돌렸다. 수천 가닥의 음강이 일어나 앞서 펼친 것들과 함께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지잉! 징-!

 

 

공명이 대기를 갈랐고, 비온 뒤 수많은 빛이 구름을 뚫고 땅까지 쏟아지는 광경이 이것 아니면 무엇이랴. 그 장엄한 광경에 눈이 부실 때, 10장 정도의 길이까지 치솟은 음강이 먹이를 앞에 둔 매의 눈처럼 류심환을 노려봤다.

 

 

'대단해. 멋있어!'

 

 

그 변화를 지켜보는 류심환의 긴장도 고조됐다. 혹시 모를 죽음이 두렵기도 했고, 자신을 향해 펼쳐질 절초(絶招)의 끝없는 변화와 위력을 알지 못했기에 긴장은 더했다. 허나, 극도의 긴장은 집중을 증폭시킨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무림인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천상천의 무공, 그것도 천상천주가 직접 펼치는 절대 초식 앞에 서있었지만 증폭된 그의 집중은 점점 하나의 길에 이르고 있었다.

 

 

"처음엔 이중 하나가, 다음엔 두 개, 그렇게 열개도 백 개도 될 수 있지. 변화는 이미 말했고."

 

 

결국, 강기의 수가 가장 많을 때 격발될 것이며 다시 다섯 단계의 변화를 일으키며 날아들겠지만 류심환도 하나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그의 모든 잠재능력마저 깨웠다. 그에겐 아직 선택할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길의 끝에서 그가 잠재능력이 내민 손을 잡았다.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푸른 느낌이 빛살처럼 스쳐갔다. 지금껏 무의식에 자리해 어렴풋했던 영감(靈感)이 전율처럼 스쳐갔다. 전율의 끝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한 가지 원리(原理)가 떠올랐다. 끝까지 밀고 갈 수 없었던 사유가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고, 마치 류심환이 원리에 이르는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번쩍! 쾅!

 

 

빛이 일었고, 검강천의 음강이 초신성처럼 폭발했다. 그 폭발은 한 개의 음강에서 시작됐으나 다음에는 2개, 그 다음엔 3개, 그렇게 10개가 연속으로 폭발했다. 이 모든 것은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났다. 속도를 따라가기도 힘든 무한정의 폭발을 향해 류심환은 그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영감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고 그는 그것에 따랐다.

 

 

‘목숨을 담보로 무엇인들 못하랴. 믿음이 원하는 걸 줄 거야.’

 

 

그렇게 염원했던 무(武)의 최후 단계에 들어서는 것, 그 초입에서 류심환은 느닷없이 떠오른 영감이 자신에게 제안한 수를 굳게 잡았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류심환의 한 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아닌, 물 위에 떠있는 지푸라기처럼 자연스러웠다.  

 

 

‘모든 무공이 그 극에 이르면 하나의 원리로 돌아온다(一極武原訣)!’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래서 어떤 위대한 초식처럼 보이지 않는 류심환의 한 수가 검강천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는 그냥 손을 뻗어 몇 번 흔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우주의 폭발 같은 음강의 모든 흐름이 멈췄다. 류심환은 이번에도 그런 단순한 동작으로 검강천의 초식을 막아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한 성공이었다.

 

 

‘어떻게 이게.. 말도 안 돼!’

 

 

검강천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정말 상대의 단순한 동작에 천지빙결검류가 파식됐다. 물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지형에 따라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자연의 섭리 같기도 하고, 우주의 원리 같기도 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문득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나의 생각이 검강천의 뇌리 속에서도 떠오르려 했다. 뭔가,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렸다.  

 

 

허나, 류심환의 느낌은 단순했다. 그것은 모든 무공의 결과를 이루는 근본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그 동안 무의식 속에 머물러 있던 그의 깨달음이 일제히 기어 나와 의식에 다리 하나를 걸쳤다. 그 다리가 몸통마저 끌어올릴 것이며 결국 몸 전체가 의식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단순했지만, 그래서 더 명료한 것 같았다.

 

 

‘천지빙결검류에는 이 방식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었어.’

 

 

류심환은 조금 전의 장면을 하나하나씩 떠올려 분리하고 다시 합쳐 보기를 수 십 차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단순한 느낌에서 시작된 이해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거리 안의 깨달음이 됐다. 가만히 있는데도 무의식에 숨어 있던 놈이 이제 몸통까지 나와 의식에 머무르려 했다.

 

 

모든 무공이 그 극에 이르면 하나의 원리로 돌아온다. 그가 마침내 그 끝에 이른 길이 거기에서 문을 열었다. 그 안은 인간의 잠재력의 보고이자 무의식의 신천지였다.

 

 

‘그래도 아직 한 가지가 남았어.’

“부탁이 있습니다.”

 

 

류심환이 말도 안 되는 현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 검강천을 향해 말했다.

 

 

“부탁?”

 

“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천상지무를 보여주십시오.”

 

 

마침내 류심환이 천하 최고의 무공인 천상지무를 언급했다. 그가 여기 온 이유이자 목적인 천상지무를 언급했다. 이미 깨달음의 근간은 얻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무공의 끝을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조금씩 다르듯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경이로운 체험이 환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자타가 공인하는 천상지무와 겨뤄야 했다.

 

 

허나 현재의 능력으로는 검강천이 펼치는 천상지무를 상대할 수 없다. 백이면 백 자신의 목숨은 지상에 소속된 것이 아닐 터였다. 천상지무를 경험하지 못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것이기에, 부딪치려고 여기까지 왔고, 온 이상 어떤 형식으로든 천상지무를 경험해야 했다.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류심환은 도박을 선택했고, 그 이후의 것들은 검창천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류심환의 어이없는 부탁에 검강천이 의외로 담담히 물었다. 그도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마친 것 같았다. 그 속까지 들여다 볼 수 없지만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류심환은 여기까지 온 거, 결과가 무엇이 되든 끝까지 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무인이 그러하듯이..”

 

“....”

 

 

류심환은 여기까지 말해놓고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뻔뻔했기 때문이다. 검강천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류심환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검강천이었기에 말없이 류심환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느리게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뒤의 얘기는 상대로부터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네, 무리라 하더라도.”

 

 

류심환의 답은 짧고 명료했다. 검강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울러 입술의 선이 방향을 위로 틀려했다. 상대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갖고 있더라 하더라도 자신이 천상지무를 펼치면 상대의 목숨은 그것으로 끝이다. 검강천의 심기가 약간 뒤틀렸다. 천상지무는 아무나 익힐 수 없는 비전의 신공이기도 했지만, 무신의 현신한다고 해도 보는 것만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천상지무를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 자체가 천문의 규율을 깨는 일이었고, 그 대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천상지무를 배우기 위해 투입한 시간만 해도 상대의 나이를 훌쩍 넘을 것이었다.   

 

 

“너무 건방지군. 무신이라고 해도 천상지무를 보는 것만으로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늘 어찌 자네 정도의..”

 

 

검창천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순간적으로 휙 하니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아득한 심연의 침묵이 흐른 후, 뜬금없이 검강천이 웃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류심환의 패를 받은 것은 분명했다. 있을 수 없는 상대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그도 류심환에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의 뇌리를 번개처럼 지나갔던 생각이 만들어낸 조건이었다.

 

 

“이 거래가 공평하려면, 나도 부탁을 하나 하겠네.”

 

 

웃음을 거둔 검강천이 말했다.

 

 

‘부탁? 천상지무를 공짜로 보여주는 대가로서?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무슨 부탁을?”

 

 

오히려 궁금해진 쪽은 류심환이었다. 검강천이 자신이 제시한 요청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지 너무나 궁금했다. 분명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인으로써, 그것도 그 끝에 이르고 싶은 야망을 가진 자로써 천상지무를 보는 대가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든 자네를 찾을 수 있게 있는 곳을 알려주게. 부탁은.. 하게 된다면, 그때 하겠네.”

 

 

‘하게 된다면 그때 부탁하겠다고? 상황에 따라서는 안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보여주는 것이 돼잖아?’

 

 

도무지 짐작할 수 없기에 류심환은 검강천의 부탁이 미칠 만큼 궁금했고, 검강천은 조건을 걸면서도 그런 조건을 실행할 날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상대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천지대란의 서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순 같은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 될 수 있지만, 천상지무를 익힌 검강천에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검강천이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류심환은 그의 부탁을 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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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와 검강천과 하나의 약속이 이뤄졌다. 빌어먹을 운명이 비틀어버린 거대한 물길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내 첫 걸음이 5년 전의 이날에 시작됐다. 그것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하늘이 마련해 놓은 또 하나의 운명이나, 거역할 수 없는 선택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을 구속하는 그 빌어먹을 운명을 따르든지, 아니면 거역해서 새로운 운명, 즉 완벽한 자유를 개척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이다.




서 - 운명, 그 오년 전의 약속1

 

 

  

드디어 운명을 바꿨다. 운명이 틀어놓은 물줄기를 제 자리로 돌려놨다. 누군가, 그것도 운명이라 한다면 나는 또 그 물결을 돌릴 것이다. 하나의 거짓과 하나의 비밀로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또 죽어갔는가. 그놈의 연극을 중원이란 무대에서 내리고, 다시 돌아온 비궁(秘宮)에서.. 무천의 하늘에서.. 나 류심환(柳心煥)이 기획하고 무영이 주연한 연극(演劇)을 그놈의 무대 위에 올렸다. 운명을 내가 바꿨다.

 

 

긴 여정의 시작은 내가 한 사람을 만난 것으로 시작됐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어, 내가 하늘 밖의 하늘, 그 후예의 자리를 버리고 무작정 비궁(秘宮)을 떠나 그를 만나 비무(比武)를 청하는 것에서 비롯됐다. 지금 내 앞에 그가 서있다. 하늘 위의 하늘, 그 천년 전설의 주인, 천상천주(天上天主) 검강천이 지금 내 앞에 서있다. 이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됐다.

 

 

'무려 삼십 합이야. 그것도 그때 그때 즉흥적인 방식 같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돼. 헌데 대체 이건..'

 

 

검강천은 지금까지의 결과를 믿을 수 없었다. 이제 약관에 이르렀을까? 상대는 어떻게든 자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물론 그가 천상천(天上天)의 무공을 펼친 것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지금까지 그가 펼친 무공은 모두 녹녹치 않은 것들이다. 평범한 무공도 그를 거치면 천하 일절(一絶)로 거듭나는데, 하물며 25합 이후의 초식은 지난 백년 이래 최강자인 무림 삼성(三聖)의 무공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이런 최강의 5합을 막아낼 수 있는 고수는 현 무림에선 한 손을 넘지 않을 것인데.. 상대는 약관 이전의 청년 같았고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예였다. 게다가 무림 역사상 최고 무인의 자리에 오른 자신조차도 쉽게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이걸 믿으란 말이야?’ 

 

 

지난 삼십 합을 다시 떠올려 봐도 상대는 일정한 규칙도 없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감(感)에 의해 손을 뻗고 흔들고 펼쳐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 분명했다. 더 놀라운 것은 상대의 내공 수위가 현 구대 문파의 장문과 비슷하거나 천상천 호법 수준에 조금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그에게 상대가 천상천을 어떻게 찾았고 천주인 자신은 또 어떻게 찾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를 처음 본 순간 그저 운명의 한 축처럼 자신의 몸을 관통했던 전율 같던 느낌만 검강천(劍强天)을 사로잡았다.

 

 

'상대에겐 내가 모르는 원리가 있어. 허면.. 방법은 하나, 본 천의 무공이야. 좋아, 한천마결로 간다. 저자가 한천마결마저 같은 방식으로 막아내는지 확인해야 저자의 원리를 알 수 있어.’

 

 

마침내 그는 상대가 지난 삼십 합에서 보여준 방식의 근본 원리를 밝히기 위해 천상천 무공을 선택했다. 천상천 무공은 격이 다르다. 천년 전설의 천상천, 그 절대문파의 무공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대가 한천마결마저 앞과 같은 방식으로 막아낸다면 그것은 우연이나 임기응변이 아닌 하나의 원리를 이루고 있음이 확실해진다. 그것은 전설의 주인인 그조차도 경험치 못한 무공의 신천지다.

 

 



결국, 그는 상황에 빠져들었다. 천상천주로써 상대를 제압하고 그에게 밝혀내야 할 것들에 대한 의무보다 작금의 상황이 더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과가 가져다 준 신선한 충격이 절대 무인으로써 더 흥미로웠고 응대방식의 간명함이 주는 의외성이 검을 든 첫 날의 초심을 떠올리게 했다. 그는 천상천 천주이기 전에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이런 즐거움, 정말 오랜만이야. 더는 없을 것 같던 무공의 신천지가 이런 터무니 없는 방식으로 열릴 수도 있다니..'

 

 

작금의 상황을 그로서는 믿기 힘들었지만 이런 결과가 절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것이 무공이다, 언제나 신천지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 그에게 솔솔 재미가 붙었다.

 

 

“류심환이라 했던가?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네. 이전의 것들은 잊게. 이제부터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검강천이 진정한 비무의 개시 선언을 했다. 결심 했기에 그는 추호의 망설임없이 한천마결의 기수식을 취했다.

 

 

“저 또한.”

 

 

칠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검강천의 행동을 지켜보던 류심환도 검강천이 변한 것처럼 그도 준비에 들어갔다. 순간, 그의 눈빛이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가라앉더니 투명해 오히려 푸른빛을 드러냈다. 그 역시 무엇인가 달라졌다. 그런 상대의 변화를 느끼며 검강천은 한천마결의 진기, 빙혈류를 어깨너비로 벌린 두 다리에 보냈다. 빙혈류가 두 다리의 혈맥을 따라 땅속으로 스며들어 대지의 깊은 곳에서 억겁을 흘러온 순정의 음기를 자극했다. 그 순정의 음기는 상대의 기운을 탐색하듯 빙혈류를 감싸더니, 그대로 솟구쳐 흡수됐다.

 

 

그는 두 다리의 혈맥을 타고 대지의 음기가 올라오자 빙혈류를 양 팔로 보내 대지의 음기가 그에 따라 장심에 이르게 했다. 두 절대음기가 하나가 된 그의 손바닥이 푸르게 채화됐다. 그는 선홍빛으로 물든 두 손바닥을 위아래로 마주보게 함으로써 하나의 구(球)를 감싸안은 모양을 취한 뒤 그 형태를 유지하며 가슴까지 내렸다. 빙혈류가 작동하자 천지 간에 퍼져 있는 한기가 들끓더니 그의 손바닥 안으로 모여들었다. 주위의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고 류심환은 엄청난 한기를 느꼈다.

 

 

순간, 검강천의 양 손 안에 두 다리를 타고 올라온 대지의 순정 음기와 천지 간에 떠다니던 한기가 하나의 구(球)로 결집됐다. 거거에 한천마결의 공결(功訣)이 흐르자 그대로 결빙됐다. 한기는 그 결빙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급속히 심해졌다. 게다가 결빙은 계속됐다. 두 기운이 손 안에서 계속 물방울을 만들었고 결빙됐다. 그에 따라 물방울 모양의 작은 결정체가 수없이 늘어났고 그때마다 류심환이 느끼는 한기의 강도는 더욱 세졌다.

 

 

시간이 흐르자 물방울도 동시다발적으로 늘어나더니 어는 한 순간 쩡! 하며 하나의 결정체로 합쳐졌다. 그것은 대지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얼려 가던 빙하기의 결빙과정을 두 손 안에 재현한 것 같았다. 류심환이 느끼는 한기의 강도는 결정체의 크기에 비래했고 곧이어 그가 더 이상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자 한기는 그 하강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검강천 손 안의 결정체도 확장을 멈췄다. 이 모든 진행이 반다경 만에 이뤄졌다.

 

 

‘내가 버텨낼 수 없는 한기의 한계점에 도달하자 공력을 더 높이지 않았어. 내 내부까지 들여다본다는 뜻, 역시 천상천주야. 천년의 전설에 허명은 없어. 허나, 난 류심환이야.'

 

 

그는 검강천이 초식의 격발세만으로 보여준 놀라운 무위에 감탄하면서도 결빙체가 회전을 멈춘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입술 근육 하나가 꿈틀했다. 그것은 파리가 내렸다가 가는 정도의 반응이어서 신경이 순간 반응을 한 것인지 아니면 회전을 멈춘 검강천의 배려에 그의 자존심이 꿈틀댄 것인지 분명치 않았다.

 

 

그때.. 검강천의 손 안에 떠있던 결정체가 맹렬한 속도로 돌았다. 반 자 정도의 결정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류심환은 살을 에는 듯한 한기에 저절로 몸이 굳어졌다. 그 순간에.. 번쩍!! 극음의 정수인 음강이 그 결빙체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도 우후죽순으로 나왔다. 그런데도 결빙체는 계속해서 돌았다.

 

 

'결국 음강의 수가 한도 없겠군.'

 

 

류심환은 그런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한공력의 소유자라도 불가능한 무위가 너무 간단히 펼쳐졌다. 그렇지만 그 간단한 동작이 만든 결과에 류심환은 살을 파고드는 한기와 하늘을 뒤덮을 듯 뻗어간 강기의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었다.

 

 

'초식의 모든 변화를 보면 안 돼. 집중해야 해. 변화의 원리를 찾아야 해.'

 

 

한천마결의 위력을 생생히 지켜본 그에게 극도의 긴장감이 일었다. 그의 본능이 긴장을 불렀고 이를 통해 그의 집중력이 살아났다.

 

 

'내겐 천상지무 외엔 의미 없어. 이를 넘어야 천상지무와 겨룰 수 있어. 넘는다, 반드시.'

 

 

그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결정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난 30합을 통해 그는 자신이 생각해도 막무가내 같던 해초(解招 : 초식을 파악해 막아내는 원리)의 원리를, 그 원리의 정수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몇 천 번, 몇 만 번의 연습을 통해 그 원리를 파고들면 완성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손발처럼 자유롭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나,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만일 검강천이 전력으로 나온다면 천상지무를 볼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천마결도 그가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막을 수 있었던 것, 류심환은 온몸에 퍼져있는 신경을 단 하나로 모으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아주 짧은 순간의 깨달음이었지만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 끌어내야 한다. 끌어내 무엇이든 이루어야 한다.

 

 

‘넘는다. 무조건 넘는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야구 만큼 다양한 기록을 중시하는 스포츠도 없다. 기록이 곧 선수와 팀의 능력을 말한다. 이렇게 기록을 중시하다 보니 야구를 떠올리면 반드시 불멸의 기록들이 따라온다. 갈수록 분업화되는 현실까지 고려하면 야구에서 기록이 갖는 의미는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타자, 투수, 팀들이 한 번의 타석, 하나의 투구, 하루의 경기에 따라 기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야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로 칭송받는 이승엽이 또 하나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어제까지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던 양준혁과 함께 1,289타점을 달성한 단 두 명의 타자였던 이승엽이 오늘 최고의 왼손투수 김광현을 상대로 중전안타를 침으로써 1타점을 더했다. 이로써 국민타자 이승엽은 1,390타점을 달성한 유일한 선수가 됐다. 타자로서 최고의 덕목은 타점을 많이 올리는 것이라면, 이승엽은 이 방면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승엽이 양준혁보다 수백 경기를 덜 띠고도 통산타점신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홈런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준혁처럼 동료와 선후배들이 루상에 많이 진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이승엽이 세운 통산타점신기록은 협동의 산물이라는데 더욱 의미가 있다. 또한 타점이 많을수록 팀의 승리에 기여하는 비중이 높아지기 때문에 오늘의 신기록은 더욱 값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엽은 한일통산 600호 홈런도 단 두 개를 남겨놓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의 신기록 행진은 내년에 은퇴할 때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홈런을 치고 타점을 올리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기록으로 쌓이고 축적되니 이보다 기분 좋은 일은 없으리라. 예상을 뛰어넘은 강정호의 성공으로 최고의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나 재팬리그로 빠져나가는 추세를 감안한다면 이승엽의 기록들은 당분간 깨지기 힘든 '넘사벽의 차원'에서 독야청청할 것으로 보인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지만, 이승엽의 기록을 넘어설 수 있는 선수가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치로를 연상시키는 구자옥 같은 선수가 KBO리그에서 20년 이상 활약한다면 모를까, 이승엽이 기록한 타점과 홈런기록을 뛰어넘을 선수는 좀처럼 나오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이승엽은 현역이면서도 전설이다. 훌륭한 인성까지 갖춘 이승엽이 오늘과 내일의 경기에서 한일통산 600호 홈런도 기록하기를 기대한다. 



                                                                                                            사진 출처 : 구글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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