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꾸며진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내가 그를 찾아 비궁을 나섰을까. 천 년을 이어온 전설이 하나의 거짓과 하나의 비밀이 조작해낸 인공적 설정인 것을 알았다면 나는 무공 최후의 단계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그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알고도 화월곡에 오년이나 머물러 있었을까.

 

 

 

그때까지 나는 운명을 비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운명이란 놈은 나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는 어떤 가능성도 열려 있는 내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신의 영역에서만 가능하고, 운명의 최종 형태를 안다면 난 하루도 더 살 이유가 없다. 너무 재미가 없을 것이고, 어떤 자유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세상 속에 있는 것,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자 인류로 이루어진 세상의 영속성이다. 나는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에만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최소한 나에게 운명 따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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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강천과 비무를 한지 오년 후였다. 그날의 비무 이후 나는 이곳에 머물러 전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 어리석음이 빌어먹을 운명을 비트는 출발점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하나의 약속이 이 모든 것의 발단이 될 줄은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와의 비무 이후 정확히 오년 만이다. 그때 고집스럽게 지켜온 나만의 경계선 안으로 천년을 이어온 최고의 무대에서 밀려난 주인공이 들어섰다. 그때는 그것도 운명이라 믿었다. 그날은 그와 비무를 한지 오년 후의 어느 날, 하늘 너무 푸르러 슬퍼보였고 녹음은 깊어 오히려 답답했으며, 대지는 너무 충만해 마음이 허기진 그런 날이었다.

 

 

 

 

군가 류심환이 쳐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오는 길을 아는 사람은 류심환이 유일했다. 천상지무를 보는 대가로 검강천에게 알려준 이곳은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동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은 류심환에게 있어 절대의 공간이자, 한 없는 기다림의 감옥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그가 땅의 진동과 공기의 파장을 감안해 살펴볼 때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편이지만 맨 앞에서 달리는 자의 경우 경공이 많이 흔들리는 것으로 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뒤를 이어 여러 명이 비슷한 속도를 내며 경계 안으로 함께 들어섰지만 흔들림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앞사람이 들어온 방향을 중심으로 몇 갈래로 포위망을 형성하며 들어온 것을 보면 그들은 추적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분명한 것은 어지러운 보법을 펼치고 있는 자가 이곳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를 쫓는 자들도 좀처럼 보기 힘든 고수라는 사실이었다. 류심환이 이곳에서 깨달은 무공의 원리에 따라 쳐놓은 경계 속으로 그들이 들어섰다 느꼈을 때, 그들은 이미 모옥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목적지가 모옥이 아니라면, 그들의 경공이 달인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고, 한 명이 도망가고 여럿이 쫓아가는 것으로 볼 때 한 바탕 소란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아니라면… 누군가 선을 넘었어.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자는.. 그래, 오직 그 뿐이야. 그에게만 입장권을 발행했으니까.'

 

 

 

류심환은 천천히 문 앞으로 나왔다. 소란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생의 마지막으로 내몰리는 자가 누구며 그를 그렇게 집요하게 쫓아오는 자들이 누구인지 일말의 궁금증은 있었다. 그래서 문 앞에 나와 섰다. 궁금증 주위를 맴도는 어지러운 바람을 애써 외면한 채 그는 거대한 대문이 열리듯 우측으로 몸을 돌렸다.

 

 

 

허나, 그가 아니라면 경계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금단의 선을 넘었기에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을 문 앞까지 나오게 했다. 죽음같이 적막했던 5년간의 시간을 그들이 깼다. 이것에 대해 그들은 어떤 식이던 간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며, 한편으로는 무한정의 약속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그가 아니면 누구도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없고 자신의 기다림은 그만이 깰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 일 푼의 궁금증에 숨어 있던 바람이 얘기했던 한 사람, 5년이란 세월을 격하여 류심환 앞에 운명처럼 서있는 한 사람.  

 

 

 

죽음의 문턱에 선 피투성이 무인, 찢어진 도포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그가 얼마나 힘든 격전을 치렀는지 짐작케 했고, 손가락 끝을 타고 지면으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은 그 상처의 깊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줬다. 그 엄중한 상태에서 얼마를 달려 온 것인가. 생의 끝까지 내몰린 채 그가 달려 온 이곳까지 그 거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그만큼의 거리와 비슷했을까. 그는 호흡이 매우 거칠었고 때 없이 흔들렸다.

 

 

허나, 그런 순간조차도 존재하는 그 자체가 위대함인 단 한 사람. 나만의 경계 안으로 들어설 때부터 내 기억 속에 각인돼 있어서 단 한 순간도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래서 귀찮아도 나올 수밖에 없었던 단 한 명의 절대자다급한 상황이 분명함에도 흔들림 없이 침잠되어 있어,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수련의 깊이를 드러내는 강렬한 눈빛의 소유자.

 

 

수많은 위험과 고비를 뚫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도 미약해진 기운이지만 이 세상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맑고 단아하며 고결한 기도. 만남의 첫 순간부터 각인돼,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단 한 사람만의 기도. 내 기억 속에 항상 머물고 있던 단 한 명의 사람. 약속이란 이름으로 내 자유를 박탈해 5년간의 고독을 안겨주었던 바로 그 사람, 검강천.

 

 

 

“천상천주 검강천.”

 

 

 

그였다. 천하에 그 아니면 누가 있겠는가. 하늘 아래 이 같은 기도를 가진 사람이 그 아니면 또 누가 있겠는가. 자신이 쳐놓은 경계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는 천년 전설의 주인공인 천상천주 검강천이었다. 5년간의 기다림 속에서 비로서 깨달은 고독의 실체를 알게 해준 사람, 그가 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을 찾아왔다.    

 

 

“류공!”

 

 

흔들리는 검강천의 부름이 류심환의 가슴에 날카롭게 닿았다. 온몸에 가득한 상처들은 너무 많고 치명적이어서 천하제일인이라고 해도 극복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렇게 많은 상처를 입은 채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기적일 따름이었다. 죽음의 순간을 필사적으로 늘려가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왼손에 품고 있는 것에 있었다.

“천주.. 오랜만입니다.”

 

 

그 짧은 부름에 역시 짧게 답하는 류심환의 음성에도 이처럼 느닷없이 일어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떨림이 묻어났다. 그것은 전혀 예측조차 못해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현실로 일어난 최악의 상황에 대한 놀람이었다. 허나, 오년 전에 한 약속, 그것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아이를 맡아주시오.”

 

 

 

검강천이 거두절미하고 왼손으로 안고 있던 아이를 건넸다. 아직까지 그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이자, 오년 전에 예약한 부탁의 내용이었다. 너무 맑고 깊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검강천의 심연 같은 눈동자가 류심환이 아이를 받아 들자 잠깐 흔들렸다. 그것은 류심환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안타까운 시선이었다.  

 

 

 

‘중독됐어!’

 

 

 

류심환은 검강천으로부터 아이를 받아든 순간, 아이가 치명적인 독에 중독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류심환이 검창천에게 눈으로 물었고, 검강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빛으로 중독의 위중함을 류심환에게 알려주었다.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늦지 않은 것 같습니다.”

 

 

 

류심환의 말에 검강천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심연으로 돌아왔다. 그가 보인 순간의 흔들림은 심연의 수면을 건드리고 날아간 잠자리의 파장 같은 것이었지만, 슬픔과 체념이 교차하는 안도의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일단 마음을 다잡자, 아니 더 이상 죽음을 늦출 여력이 없을 인정하자, 애당초 그에게 흔들림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처럼 보였다. 

 

 

“아이 이름은 무영이네.”

 

 

 

검강천이 건내준 아이를 류심환이 말없이 안아 들었다. 예닐곱 살 가량으로 보이는 아이는 자신이 낯선 이의 품으로 넘겨졌음에도 입을 굳게 다문 채 또렷한 눈망울만 깜박이고 있었다. 중독의 고통 속에서도 현 상황의 위급함을 정확히 알기에 아이는 신음소리를 내거나 울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깊게 가라앉은 채 두려움을 감추며 아비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과 꽉 다문 입술이 류심환의 뇌리에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느낌은 너무나 생경했지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어쩌면 아버지보다 뛰어난 아이일지도..’

 

 

 

급히 진기를 주입해 중독의 속도를 줄이며 아이의 상태를 살펴본 류심환은 아이의 신체가 무술을 위해 태어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맑고 청아해 슬픔을 간직한 듯한 아이 눈빛이 검강천과 류심환을 인연의 끈으로 다시 묶은 것은 설명하기 힘든 인연 같았다. 조건이 약속이 되고, 약속이 새로운 인연을 창조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아이와의 인연은 질긴 운명으로 발전해 가리라. 늘 그랬듯 빌어먹을 운명은 원치 않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법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그렇게 다시 닻을 올린 운명이란 놈이 류심환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비틀었다. 그 비틀림의 시작에 검강천이 있었고, 중간에 류심환과 무영이 있었고, 그 끝에 그로부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자들의 소리가 들렸다.

 

 

 

‘불나방 같은 놈들…’

 

 

 

“저기다!”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소리쳤다. 그렇게 새로운 인연을 창조한 운명이 추격자 무리의 외침을 빌려 검강천과 아이에게 소리쳤다. 그 소리의 시작은 수십 장 밖이었는데 어느 새 그들도 모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추적자들은 무서운 속도로 검강천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 중에는 검강천과 비슷한 옷을 입은 자들도 있었다.

 

 

 

늘 안 좋은 예감은 현실이 된다. 안 좋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렇게 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삶에서 안 좋은 예감은 늘 그랬다.

 

 

 

‘역모?’

 

 

 

류심환은 기세당당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추적자들을 보며 검강천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왜 안 좋은 예감이 늘 이렇게 맞아 떨어지는 지 추적자 무리들을 응시했다.

 

 

 

‘내부의 소행이 아니면 천하에 이런 상황을 만들 자는 어디에도 없겠지.’

 

역시 안 좋은 예감에 예외는 없었다, 지금처럼. 검강천을 살해하려는 역도들의 내는 경공의 파공음이 그의 등 뒤에 이르렀다. 천년 무림의 최강자, 검강천의 죽음을 재촉하는 소리가 행동으로 이뤄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검강천과 류심환에게 그들의 존재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둘 사이에는 오년 전의 약속만 의미 있었다. 무영의 미래, 그리고 그밖의 무수한 일들..

 

 

 

“아이를 무인으로 키워주시게.”

 

 

 

이것이 류심환이 검강천으로부터 들었던 마지막 말이다. 천상천의 신물 천상옥패와 그의 애검인 승천제마검, 그리고 한 권의 서책을 건네면서 검강천이 류심환에게 했던 마지막 말이다. 이것으로 천년의 전설에 처음으로 금이 갔고 그 금은 너무 커서 전설을 뿌리 채 흔들었지만 류심환을 보는 전설의 주인, 검강천의 눈에는 분명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의 약속으로 인해 천상천이 살아 있음을, 이를 아이가 입증할 수 있도록 천하제일인으로 키워주시게. 부탁하네.’

 

 

 

검강천의 믿음이 류심환에게 말하고 있었다. 허나, 천상천주 검강천만 놓고 보면 한 번 기울어진 위세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기울어진 틈새를 노려 불나방들의 검, 도, 장, 지 등 탐욕과 역겨움의 짓거리가 역천이란 이름으로 가장해 전설의 주인에게 날아들었다. 전설이나 신화가 영원할 수는 없다면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리라.

 

 

 

“알겠습니다. 약속 지키지요.”

 

 

 

류심환이 아이를 품에 안고 돌아섰다. 독에 힘겹게 버티던 아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아비의 죽음을 보기 싫었던 듯,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듯, 천상무극독에 악착같이 버텼던 아이가 의식의 마지막 조각을 놓쳐버렸다. 류심환의 응급조치에 의해 아이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것을 지켜본 검강천도 자신의 등 뒤까지 살수를 펼친 그의 형제와 식솔들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두 사람의 등이 마주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든 것이 멈춰 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억겁을 두고 그렇게 서 있어 세월의 흐름도 멈춰선 듯 했다. 그 사이에서는 역모의 탐욕자들이 펼친 가공할 위력의 합공은 존재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사물이 정지된 채 절대의 고요에 빠져들어 두 운명의 스쳐감과 틀어짐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낌을 다 누리기도 전에 두 사람은 앞으로 날아갔다. 한 사람은 이미 자신의 것이 되어버린 죽음을 향해, 한 사람은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연의 미래를 향해.

 

[그래서 천상천을 다시 세우는 날..]

[우리의 약속도 지켜지게 되겠지요.]

 

 

 

두 사람 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음이 오갔고 검강천으로서는 그 이상의 전음을 이어가기란 불가능했다. 그를 향해 달려드는 자들을 막기에도 힘겨웠기에. 류심환이 무영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시간이 남아 있기도 했고. 자신을 쫓아온 무리들은 이들만이 아니었고,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까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가 남아 있었다.

 

 

'무영아, 잘 자라서 아비처럼 후회를 남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라. 아비는 비록 떠나지만 언제나 네 주위에서 함께 할 거야.

 

 

 

검강천이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진기까지 끌어올려 몸을 날렸다. 신화의 영역에서 더욱 빛났던 그의 검이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5년전 류심환에게 보여주었던 천상지무가 두 번째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위력은 너무나 달라서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자격이 없었다. 약간의 시간을 끌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였다. 전설의 영역에 올라선 신화의 주인공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 덕분에 신화는 계속될 수 있었지만. 

 

 

‘아빠… 아빠…’

 

 

혼절한 아이의 보낼 수 없는 마음이 마지막까지 그곳에 남아 몇 날을 목 놓아 울었다. 그때 하늘 밖에 있던 하나의 떠 있는 눈이 빙긋거렸다. 눈짓으로만. 그 빌어먹을 운명의 장난질이 인간에게 해왔던 것처럼, 하나의 떠 있는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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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은, 무려 천년 동안 얽히고 섞여서 부대끼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아픔과 회한의 여정(旅程)에서, 덧없이 사라진 수많은 죽음을 양산했고 그에 따른 복수의 대물림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삶과 죽음, 명성과 배신, 욕망과 탐욕, 정의와 협력 사이에서 이 모든 일은 하나의 전설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검강천을 만나 비무를 청한 것에서 시작하여, 그의 아들인 무영이 무대 위로 올라 임시주연이 아닌 진정한 주연임을 선언하는 순간 끝이 났다. 운명이 틀어버린 무림과 그에 얽힌 수많은 단상들의 허튼 꿈과 욕망과 처절한 몸부림의 물길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그 기나긴 여정은 하나의 전설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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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전설이 있다. 그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전설을 고금제일이라 불렸으며, 그 전설의 주인이 홀로 나타나 건곤일척의 천하를 구했으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설이 되어버린 것.

 

 

무림의 역사에는 존재했으나 군림하지 않는 한 가지 전설이 있다. 하늘 위에 위치한 하늘, 절대 문파 천상천(天上天)과 그 천상천을 전설의 영역에 들게 한 오직 하나의 절대무공. 천상지무(天上之武)! 홀로 일어나 천하지혈난(天下之血亂)을 종식시킨 단 한 명의 영웅에게만 몸을 허락한 절대신공.

 

 

무인이라면 누구나 이르고자 하는 무공의 최후 경지. 무림 역사상 단 한 사람만이 이르렀다고 전해 내려오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 말로 들었으나 전해지지 않아 볼 수 없었고, 못 봤기에 상상하였으나 누구도 그려낼 수 없었던 전능의 위력은 오직 무림 역사 상 단 하나의 사건으로만 전해졌다.

 

 

천 년 전 무림 태동기, 정파의 무공이 뿌리내리기도 전에 마의 화신인 음양합일역천지마(陰陽合一逆天之魔) 화극연이 역천마곡(逆天麻谷)을 세워 지옥혈왕의 열두 가지 힘, 십이마혼(十二魔魂)을 깨우고, 하나같이 절정 마인으로 키워낸 400명의 살귀를 이끌고 나타나 세외무림에서 중원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무차별로 살육해 가던 시절에 전설은 시작됐다.

 

 

그 천하 존망의 위기에 한 명의 영웅이 홀연히 나타나 절대마인과 그 혈겁의 추종자들을 홀로 처단해 갔다. 첫 발검으로 시작한 무림 구원사는 꼬박 1년이 흘러 태산의 정상에서 절대 마인 화극연을 전설의 검, 승천제마검(昇天制魔劍)으로 양단하니, 시산혈해를 이룬 혈겁은 그것으로 진저리 치는 피의 향연을 멈추게 됐다. 홀로 무림을 다니며 절대마인을 제거해 세상을 구하니(獨行武林 殺魔求世)비로소 검을 놓고 단 한 마디의 칭송도 받지 않은 채, 영웅은 자신이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무인과 일반인 가릴 것 없이 세상은 그를 칭송하여 무림혈록에 기록하기를 '정사무한대첩(正邪無限大捷)'이라 했으니 그것이 1년간의 혈겁의 역사며 홀로 진행한 무림 구원의 대장정이었다. 그가 절대마인과 그 추종자들을 한 자루의 검으로 베어가던 그 1년간의 여정을 천검지로(天劍之路)라 명명했고, 영웅의 업적을 기려 그를 천상무존(天上武尊)이라 칭송했으며, 그의 무공을 하늘의 무공이라 하여 천상지무(天上之武)라 함에 천 년 무림 혈사의 첫 장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이렇게 그날의 일은 전설의 첫 장에서 인구에 회자되어 전설의 영역으로 들어섰고 그가 걸었던 독행무림(獨行武林)의 영광을 모든 무인들이 추구하여 하루도 검을 놓지 않으니 무림은 그것으로부터 흥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무림은 세상의 중심에 뿌리를 내렸으며 역사를 이루고 또 다른 영웅을 탄생시키며 전설의 장을 넓혀 갔으니 무림 역사가 이로써 비롯됐다 해도 과함이 아니었다.

 

 

                                                                      행복한 산쟁이에서 인용  

              

 

그리고 한 가지 말, 모든 영광과 흠모를 뒤로 한 채 다시 은둔으로 돌아가면 천상천주가 했던 말이 인구(人口)에 회자되니 그것이 천 년에 걸쳐 더해지고 부풀려져 하나의 전설에 이른다. 말이란 기억을 통해 상상을 자극하기에, 경험 이전의 신비감을 갖기 마련이며, 그래서 몇 마디 말에 불과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끝없이 회자되기에 모든 세대를 걸쳐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멸의 존재로 우상화된다. 거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당시의 사실은 신화의 영역으로 올라간 후, 태양처럼 빛나는 부분만 세상을 회자한다.

 

 

“내 이제 천하를 구하고 떠나니 신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자 다음을 기억하라.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그 아래이니, 내 생각 속에 모든 바람을 담고 내 육체 속에 생각을 풀어놓아라. 태극(太極)에서 십방(十方)까지 만물의 이치가 이 안에 있으며 깨달음을 얻는 자 그 흐름을 자신이 되게 하라. 그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자 영원히 하늘 아래 있고 그 경지를 넘어선 자 하늘 위에 있으리라. 내가 이루지 못한 이 경지를 뛰어넘는 자, 비로소 천하를 얻고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후인이여, 무림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는 날 다시 하늘을 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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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강천은 마음이 급했다. 속도를 낼수록 오른쪽 어깨를 관통한 상처와 깊게 갈라진 왼쪽 옆구리에서계속 피가 흘렀다. 내상도 치명적이어서 최소한의 운기조식이라도 해야 했지만 점점 가까워 오는 포위망에 아예 쉴 수도 없었다. 피와 땀이 뒤범벅돼 그의 등 뒤로 빠르게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 처음에 30장마다 떨어졌던 핏자국은 지금에 이르러 3장으로 좁혀졌으니 그의 내력도 점점 고갈됐고, 그만큼 남은 삶의 시간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지러웠다. 전력질주가 네 시진을 넘어서면서부터 어지러움은 달리는 속도를 뭉툭 뭉툭 갉아먹었다. 살을 가르는 통증이야 그렇다 쳐도 한 시진 전부터 흩어지기 시작한 기력은 점점 바닥을 향해 달렸고 이를 알면서도 어떤 조처도 취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이야 이미 버렸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 역천의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의미가 없어졌다. 아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순간부터 자신의 삶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실존하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존재였다. 신화의 주인에게 주어지는 삶이란 너무나 협소해, 천하가 혈란에 빠져들지 않은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이들보다 높은 곳에 있었지만, 칭송의 대상이었지 그들 사이에 있을 수 없었고, 존재하는 인간이었지만 그 실재가 현존하는 인물로 세상에 속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검강천은 지독히 외로웠고, 누구와도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죽음으로써 신화의 영역에 올라올 때까지는 자유로워질 자신의 아들이었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해.’

 

 

모든 것이 잘못됐지만, 잘못돼 한참은 정도에서 벗어났지만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그것은 천년 전설의 진정한 주인이 이 아이이며, 이 아이만이 변질된 천년의 전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아이로 인해 전설은 더 이상 신화의 영역에 머무를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이에게 모든 가능성이 닫혀 있었다, 반나절 전까지는.

 

 

‘신화는 당사자에게 지옥이야. 이 아이는 지옥에 오르기 전까지만이라도 자유로워야 해.’

 

 

검강천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가 지금 죽을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이를 살려야 가능하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달리면서도 운기행공이나 지혈도 할 수 없었다. 촌각의 시간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으나 그것을 탓하지 않았고, 그것이 옳다면 누구의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으며, 먼저 돌아서지 않았고, 한 번 준 믿음은 이미 주었기에 거둔 적이 없었다.

 

 

헌데 평생을 함께 해온 이복형의 절대권력을 향한 탐욕의 칼에, 모든 것을 쥐고 싶었던 한 여인의 부정한 욕망에 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 이제는 이 아이마저 위태롭다. 무림은 전쟁을 통해 세력을 넓혀가고, 상인들과의 거래를 통해 부를 늘리며, 뛰어나 자질을 소유한 문도를 늘림으로써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정치를 닮았다. 절대적 힘을 갖게 되면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인 정치를 닮아서 무림은 피와 배신, 복수의 역사와 동일하다. 악은 그런 과정에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해서.. 살려야 했다. 이 아이만은 살려야 했다. 내 유일한 핏줄이어서가 아니라, 아이의 어미, 그 처참한 죽음 때문이 아니라, 틀어진 천년의 전설을 바르게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아이가 살아야 하고 내가 죽어야 하는 이유다. 그 이유만으로 나는 내 아내의 죽음까지 받아들였다, 피눈물과 죽어서도 용서받지 못할 천형(天刑)의 사랑으로. 검강천은 마음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지이잉!

지-잉!

 

 

그의 오른손에서 승천제마검(乘天制魔劍)이 슬프게 울었다. 주인의 상황을 알고 있는지 검명에는 습기가 가득해 검루(劍淚)를 뚝뚝 흘릴 듯 슬프게 울었다. 빠르게 뒤로 눕는 풀들 위로 여전히 검붉은 피와 영혼마저 잠식하는 땀이 떨어져 내렸고 하늘도 슬픈지 서쪽으로 길게 스러져 갔다. 어둠은 그에게만 밀려들었고 어디에서도 빛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검강천으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 너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니..’

 

 

그의 내력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다리도 하염없이 무거워졌고 아무리 애를 써도 속도는 떨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 없었다. 하나의 약속이 남았기에 그는 쓰러질 수 없었다. 죽음이 그것을 막는다면 죽음부터 벨 것이고, 죽음을 베지 못한다면, 혼백이 되어서라도 약속의 땅으로 갈 것이기에 한 움큼도 남지 않은 의식을 한시라도 놓을 수 없었다.

 

 

가서, 그를 만나야 한다. 그에게 이 아이를 맡겨야 한다.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전설과 같은 영역에 올라선 사람, 류심환. 그에게 이 아이를 맡겨야 한다. 그 하나의 이유로 나는 쓰러질 수 없다. 기력이 다해 다리가 멈추면 기어서라도 가리라. 무릎이 다 닳아 뼈가 드러나 길 수 없다면 손가락으로 땅을 긁어서라도 가리라.

 

 

나에게 마지막 하나는 남았다. 하나의 약속만은 남았다. 오년 전에 했지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바람처럼 지나간 약속, 그 하나만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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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식명은 천지빙결검류(天地氷結劍流)라 하네. 한천마결의 제1초지.”

 

 

검강천은 극음지기의 정수, 빙혈류를 천상천의 천상무극진기(天上無極眞氣)에 실었다. 빙혈류가 만든 적홍의 음강이 점점 투명해졌다. 색의 변화는 투명함으로써 오히려 적홍의 음강보다 더 강렬하게 보였다. 어쨌든 차가운 음강 아닌가.

 

 

"비록 제1초식이라 해도 각 빙강마다 다섯 단계의 변화가 있네. 단순히 음강의 격발만은 아니라는 것이지."

 

 

말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손 안에서 키운 음기의 결정체, 구를 맹렬하게 돌렸다. 수천 가닥의 음강이 일어나 앞서 펼친 것들과 함께 잠시 공중에 머물렀다.

 

 

지잉! 징-!

 

 

공명이 대기를 갈랐고, 비온 뒤 수많은 빛이 구름을 뚫고 땅까지 쏟아지는 광경이 이것 아니면 무엇이랴. 그 장엄한 광경에 눈이 부실 때, 10장 정도의 길이까지 치솟은 음강이 먹이를 앞에 둔 매의 눈처럼 류심환을 노려봤다.

 

 

'대단해. 멋있어!'

 

 

그 변화를 지켜보는 류심환의 긴장도 고조됐다. 혹시 모를 죽음이 두렵기도 했고, 자신을 향해 펼쳐질 절초(絶招)의 끝없는 변화와 위력을 알지 못했기에 긴장은 더했다. 허나, 극도의 긴장은 집중을 증폭시킨다. 그는 지금까지 어떤 무림인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천상천의 무공, 그것도 천상천주가 직접 펼치는 절대 초식 앞에 서있었지만 증폭된 그의 집중은 점점 하나의 길에 이르고 있었다.

 

 

"처음엔 이중 하나가, 다음엔 두 개, 그렇게 열개도 백 개도 될 수 있지. 변화는 이미 말했고."

 

 

결국, 강기의 수가 가장 많을 때 격발될 것이며 다시 다섯 단계의 변화를 일으키며 날아들겠지만 류심환도 하나의 길에 들어서 있었다. 그의 모든 잠재능력마저 깨웠다. 그에겐 아직 선택할 것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길의 끝에서 그가 잠재능력이 내민 손을 잡았다.

 

 

                                                                   

             

 

순간, 온몸을 관통하는 푸른 느낌이 빛살처럼 스쳐갔다. 지금껏 무의식에 자리해 어렴풋했던 영감(靈感)이 전율처럼 스쳐갔다. 전율의 끝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한 가지 원리(原理)가 떠올랐다. 끝까지 밀고 갈 수 없었던 사유가 마침내 목적지 근처에 도달했고, 마치 류심환이 원리에 이르는 시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번쩍! 쾅!

 

 

빛이 일었고, 검강천의 음강이 초신성처럼 폭발했다. 그 폭발은 한 개의 음강에서 시작됐으나 다음에는 2개, 그 다음엔 3개, 그렇게 10개가 연속으로 폭발했다. 이 모든 것은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났다. 속도를 따라가기도 힘든 무한정의 폭발을 향해 류심환은 그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영감이 그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고 그는 그것에 따랐다.

 

 

‘목숨을 담보로 무엇인들 못하랴. 믿음이 원하는 걸 줄 거야.’

 

 

그렇게 염원했던 무(武)의 최후 단계에 들어서는 것, 그 초입에서 류심환은 느닷없이 떠오른 영감이 자신에게 제안한 수를 굳게 잡았다.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류심환의 한 수는 물에 빠진 사람이 아닌, 물 위에 떠있는 지푸라기처럼 자연스러웠다.  

 

 

‘모든 무공이 그 극에 이르면 하나의 원리로 돌아온다(一極武原訣)!’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래서 어떤 위대한 초식처럼 보이지 않는 류심환의 한 수가 검강천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는 그냥 손을 뻗어 몇 번 흔든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우주의 폭발 같은 음강의 모든 흐름이 멈췄다. 류심환은 이번에도 그런 단순한 동작으로 검강천의 초식을 막아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완벽한 성공이었다.

 

 

‘어떻게 이게.. 말도 안 돼!’

 

 

검강천이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정말 상대의 단순한 동작에 천지빙결검류가 파식됐다. 물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지형에 따라 흘러가는 듯한 느낌이랄까? 자연의 섭리 같기도 하고, 우주의 원리 같기도 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문득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나의 생각이 검강천의 뇌리 속에서도 떠오르려 했다. 뭔가, 새로운 어떤 것이 꿈틀거렸다.  

 

 

허나, 류심환의 느낌은 단순했다. 그것은 모든 무공의 결과를 이루는 근본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그 동안 무의식 속에 머물러 있던 그의 깨달음이 일제히 기어 나와 의식에 다리 하나를 걸쳤다. 그 다리가 몸통마저 끌어올릴 것이며 결국 몸 전체가 의식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단순했지만, 그래서 더 명료한 것 같았다.

 

 

‘천지빙결검류에는 이 방식이 가장 적절한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었어.’

 

 

류심환은 조금 전의 장면을 하나하나씩 떠올려 분리하고 다시 합쳐 보기를 수 십 차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단순한 느낌에서 시작된 이해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거리 안의 깨달음이 됐다. 가만히 있는데도 무의식에 숨어 있던 놈이 이제 몸통까지 나와 의식에 머무르려 했다.

 

 

모든 무공이 그 극에 이르면 하나의 원리로 돌아온다. 그가 마침내 그 끝에 이른 길이 거기에서 문을 열었다. 그 안은 인간의 잠재력의 보고이자 무의식의 신천지였다.

 

 

‘그래도 아직 한 가지가 남았어.’

“부탁이 있습니다.”

 

 

류심환이 말도 안 되는 현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는 검강천을 향해 말했다.

 

 

“부탁?”

 

“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천상지무를 보여주십시오.”

 

 

마침내 류심환이 천하 최고의 무공인 천상지무를 언급했다. 그가 여기 온 이유이자 목적인 천상지무를 언급했다. 이미 깨달음의 근간은 얻었지만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무공의 끝을 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조금씩 다르듯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경이로운 체험이 환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자타가 공인하는 천상지무와 겨뤄야 했다.

 

 

허나 현재의 능력으로는 검강천이 펼치는 천상지무를 상대할 수 없다. 백이면 백 자신의 목숨은 지상에 소속된 것이 아닐 터였다. 천상지무를 경험하지 못하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을 것이기에, 부딪치려고 여기까지 왔고, 온 이상 어떤 형식으로든 천상지무를 경험해야 했다.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류심환은 도박을 선택했고, 그 이후의 것들은 검창천이 마음 먹기에 달려 있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류심환의 어이없는 부탁에 검강천이 의외로 담담히 물었다. 그도 현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마친 것 같았다. 그 속까지 들여다 볼 수 없지만 무슨 생각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류심환은 여기까지 온 거, 결과가 무엇이 되든 끝까지 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든 무인이 그러하듯이..”

 

“....”

 

 

류심환은 여기까지 말해놓고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뻔뻔했기 때문이다. 검강천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리는 류심환의 요청이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검강천이었기에 말없이 류심환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느리게 눈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신 후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뒤의 얘기는 상대로부터 굳이 듣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

 

“네, 무리라 하더라도.”

 

 

류심환의 답은 짧고 명료했다. 검강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울러 입술의 선이 방향을 위로 틀려했다. 상대가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갖고 있더라 하더라도 자신이 천상지무를 펼치면 상대의 목숨은 그것으로 끝이다. 검강천의 심기가 약간 뒤틀렸다. 천상지무는 아무나 익힐 수 없는 비전의 신공이기도 했지만, 무신의 현신한다고 해도 보는 것만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천상지무를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 자체가 천문의 규율을 깨는 일이었고, 그 대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천상지무를 배우기 위해 투입한 시간만 해도 상대의 나이를 훌쩍 넘을 것이었다.   

 

 

“너무 건방지군. 무신이라고 해도 천상지무를 보는 것만으로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늘 어찌 자네 정도의..”

 

 

검창천의 말이 여기에 이르렀을 순간적으로 휙 하니 머리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아득한 심연의 침묵이 흐른 후, 뜬금없이 검강천이 웃었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류심환의 패를 받은 것은 분명했다. 있을 수 없는 상대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그도 류심환에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의 뇌리를 번개처럼 지나갔던 생각이 만들어낸 조건이었다.

 

 

“이 거래가 공평하려면, 나도 부탁을 하나 하겠네.”

 

 

웃음을 거둔 검강천이 말했다.

 

 

‘부탁? 천상지무를 공짜로 보여주는 대가로서? 대체 그것이 무엇이기에..’

“무슨 부탁을?”

 

 

오히려 궁금해진 쪽은 류심환이었다. 검강천이 자신이 제시한 요청의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지 너무나 궁금했다. 분명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인으로써, 그것도 그 끝에 이르고 싶은 야망을 가진 자로써 천상지무를 보는 대가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기에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언제든 자네를 찾을 수 있게 있는 곳을 알려주게. 부탁은.. 하게 된다면, 그때 하겠네.”

 

 

‘하게 된다면 그때 부탁하겠다고? 상황에 따라서는 안 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미래는 알 수 없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보여주는 것이 돼잖아?’

 

 

도무지 짐작할 수 없기에 류심환은 검강천의 부탁이 미칠 만큼 궁금했고, 검강천은 조건을 걸면서도 그런 조건을 실행할 날이 도래하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이 상대에게 부탁할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천지대란의 서막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순 같은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 될 수 있지만, 천상지무를 익힌 검강천에게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검강천이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류심환은 그의 부탁을 받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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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와 검강천과 하나의 약속이 이뤄졌다. 빌어먹을 운명이 비틀어버린 거대한 물길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내 첫 걸음이 5년 전의 이날에 시작됐다. 그것은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하늘이 마련해 놓은 또 하나의 운명이나, 거역할 수 없는 선택지 같은 것이었다. 인간을 구속하는 그 빌어먹을 운명을 따르든지, 아니면 거역해서 새로운 운명, 즉 완벽한 자유를 개척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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